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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8. 100일 간의 챌린지, 마지막 글: 버티고 견디다

생각한줄

by 브랜드 컨셉영화제 최다예 에디터 2020. 9. 2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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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_Jake Blucker

내가 미루고 미루던 블로그를 열게된 것. 일을 하면서 귀찮고 때로는 올릴 말도 없지만, 그러나 무엇이라고 끄적여 보게 된 것은 동료들과 함께 하기로 약속한 '100일 챌린지'를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약속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100일'에 도달하기 까지 단 2일이 남은 지금. 버티는 것, 견뎌낸다는 것에 대해 문득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계기는 두 개의 드라마로부터 였다. 둘 다 큰 인기를 끌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보지 못했던 드라마.

'미생'과 '이태원 클라쓰'.

 

하나는 현 시대의 직장인들이 겪는 고충과 심리를 리얼리티하게 풀어낸(그래도 어느정도의 '드라마틱한' 전개는 있지만) 드라마이고, 하나는 자신만의 신념을 지켜가며 대기업을 상대로 통쾌한 복수를 일구어 내는 내용의 이야기지만, 두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를 보다보면 '버틴다'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버티는 힘이 거의 '전무'하다. 무슨 일을 해도 쉽게 질리고 지레 겁먹고 포기한 적도 많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은 마인드는 나만의 의견이나 기준보다는 이리 흔들리고 저리 휩쓸리는 성격을 만들어냈다. 조그마한 변명을 하자면 각자의 의견이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어떠한 회의에서든 나는 나만의 의견을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아니, 우선 나만의 곧은 신념이나 기준이 없다. 혹여 있더라도 '내가 틀릴 수도 있잖아' 싶은 마음에, 혹은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사라지고 만다.

 

아마 그래서일까?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를 '버텨내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게 된다. 도대체 지속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관찰하게 된다.  아마 두 드라마를 찾아보게 된 것도 '장그래'와 '박새로이'만의 색채로 '버텨가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닮고 싶었던 덕분이겠지. 예전에는 재치있고 똑똑한 사람만이 멋있어보였는데, 나이가 드니 자신만의 생각과 색채로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이 대단해보인다. 

 

100일 챌린지로서는 마지막 글이 될테다. 마지막 글. 지난 100일을 돌아볼까, 이것을 기록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기록해볼까. 고민하다가 최근 두 개의 드라마와 함께 고민하는 이 이야기를 마지막에 써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버티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나름대로 의미있는 마무리가 아닐까 싶다 :-)


 

 

위험한 곳을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것을 외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용기다.

순류에 역류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그러니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야 말로 최고의 방어수단이자 공격수단이 되는 것이다.

- 드라마 <미생> 中

 

순류를 견지하는 것,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

두 가지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나의 방향과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대학생시절부터의 고민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 나는 어떤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조금 더 크면, 조금 더 나이가 들면, 회사에 취직하면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에도 아직 모르겠다. 누군가는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 하고 누군가는 따뜻한 대한민국을 만들거라 하는데. 나는 무엇을 하면 좋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나에게는 어떤 재능(Talent)가 있는지. 아직도 하나도 모르겠다.

 

문득 든 생각은 혹시 나에게 미미한 순류가 있었으나, 역류에 휩싸여 이도 저도 아닌 흐름이 된 것은 아닐까 싶은 걱정이다. 아마 답은 평생 알 수 없겠지. 지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저 하루하루를 곧게 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가장 후회가 남지 않는 선택지를 고르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감내하고 대가를 치르는 삶을 살아가자.

 

오차장: 내가 뭐라그랬어? 
장그래: 버텨라.
오차장: 그리고?
장그래: 이겨라.
오차장: 명심해. 이제 가!

- 드라마 <미생> 中

 

별 다른 대사도 없는 이 장면이 강렬하게 남는 까닭은 몇 줄 안되는 아주 짧고 단순한 대사가 모든 것의 핵심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딘가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아직도 이 문장을 온연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버티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다.

 

초등학생일 때는 중학생이 되면, 중학생일 때는 대학교에 가면, 대학생일 때는 직장에 가면, 그 이후부터는 그냥 알아서 '저절로' 살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에서야 보면 가당치 않지만. 그 때는 그랬다. 지금도 때때로는 그렇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 수는 없을까. 꼭 이렇게 온갖 힘을 다해서 버텨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는데, 주변에서는 왜 더 치열하게 버텨내라고 하는 것일까.

 

아직은 조금 짧은 생일 수도 있지만, 결국 버티는 게 인생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살기 위해서는 버텨야 한다. 무엇으로부터?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 것만 같은 좌절감, 수치심, 등등등. 버티고 버티며 아우성을 치다보면, 언젠간 새로운 직면을 맞이하게 된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삶은 그랬다. 

 

 

장회장: 포기하고 적당히 살아. 그만 가지.

장근원: 네, 아버지

박새로이: 포기하고 적당히. 무리입니다. 고집, 객기. 제 삶 자체. 티가 났다니, 다시 말씀드리죠. 더딜지는 몰라도, 저는 단계를 밟고 있고, 그 끝에 당신이 있습니다.

 

버티다와 견디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각각 이렇다.

 

버티다 : 네이버 국어사전 검색
견디다 : 네이버 국어사전 검색

버티고 견디는 것은 그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압력, 혹은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포기를 향한 유혹 등 수없이 많은 '역류'로부터 흘러가기 위해서는 몇 배의 에너지가 들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버티고 견디는 사람들을 보면 '절박함'과 '애절함'이 느껴진다.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치열함이 있다.  미생의 마지막화 쯤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길이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같은 맥이 아닐까 싶다. 나아가기 위해서, 역류에 맞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그 이상을 가져가기 위해서.  치열하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버티고 견디는 사람들이다.


챌린지로서 적는 마지막 글조차 반성으로 끝난다는 것은 참 안타깝고 재미없는 일이지만, 아마 인생 마지막까지 이렇게 반성하고 되새기는 글을 더 많이 적게 되지 않을까-싶은 점에서는 '이렇게 끝을 내게 될 수 밖에 없는 일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블로그에 나는 과연 얼마나 더 글을 쓰고 유지하게 될까? 그것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없애지 않는 이상, 이 글들을 쭉 남아있겠지. 그리고 먼 훗날의 내가 다시 들어와 조금은 오그라드는 글을 보며 이런 저런 것들을 추억하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 때의 나는 어떤 생각과 고민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지. 삶은 잘 버텨내고 있을지. 나만의 '순류'는 찾았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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